[B's Friend] 그 이후의 이런저런 생각들
- 김나연
- 2015년 6월 23일
- 3분 분량
ESSAY
* 그 이후의 이런저런 생각들
그가 난데없이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혜화에서 만나 신나게 연극도 보고 길거리 구경도 실컷 한 뒤에 봉춘 찜닭에서 찜닭을 먹다가. 내가 더 좋아지지 않는다고, 떨어져 있어도 생각이 별로 나지않는다며 준비해온 것이 분명한 말들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심장이 기분 나쁘게 미친 듯이 뛰었다. 의례적으로 하는 그의 말들이 귀에 들리지가 않았고, 할 말 없냐는 그의 말에 마땅히 대답할 만한 말이 없었다. 이미 혼자 모든 정리를 다 해놓고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말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그가 내게 해주었던 모든 말들이 입 발린 소리 같았다.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한 사소한 말들이 나를 뼈아프게 공격했고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있는 그의 흔적들 때문에 한시도 그 사람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는 친구들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네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도 듣기 싫었다. 왜 그 사람이, 내가 선택하고 좋아했던 그 사람이 내 인연이 아니라는 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그 사람은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는지, 이 순간에도 나는 왜 혼자 고통 받고 있는지 억울했다. 이 고통은 언제 끝나는지, 끝나긴 하는지.
더 슬픈 것은 끝없는 비관과 자존감의 하락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잘만 만나는데 왜 나는 그게 안 될까 끊임없이 비교하고 원인과 문제를 찾아 수없이 생각했다. 진심은 언젠간 통한다더니 왜 그 사람에게 내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는지, 나를 정말 많이, 변함없이 사랑해줄 사람이 나타날지, 나타난다면 언제인지, 하는 그런 답 없는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그 즈음에 나는 드라마 킬미힐미를 보고 있었다. 극중에서 지성은 어릴 적 학대받은 황정음에게, 당신이 뭔가를 잘못해서 혹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서 학대를 받은 건 아니라고,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사랑받아 마땅할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고, 그러니까 잊고 이제부터 사랑받고 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서 정말 몇 시간 동안 펑펑 울었다. 이별한 누구나 다 그렇듯이 이 대사가 정말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힘내라고. 넌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그래서 다짐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진심으로 사랑해줄 사람 하나쯤은 분명히 있을 거고 나는 앞으로는 충만하게 사랑받는 연애만 하겠다고. 절대 나 스스로 내 가치를 낮추지 않을 거라고.
정말 사랑받아보고 싶었다. 나의 모습 그대로를 좋아해주는 사람, 내가 전전긍긍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편한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다. 그 전까지의 나는 날 좋아해주는 사람보단 내가 좋아야 좋은 거라며 ‘그 사람 내 스타일 아니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 이상형이여도 그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개강을 했고 어느덧 봄이 왔지만 난 여전히 혼자였다. 여기저기서 꽃 축제도 하고 벚꽃도 폈지만 내 마음은 펴지지가 않았다. 중간고사를 치르고 났는데, 교양 같은 조원인 두 살 어린 남자애가 연락이 왔다. 연락을 이어가다가 저녁에 만나서 산책도 하고 밥도 먹고 그러다 연인사이가 되었다. 알고 보니 남자친구는 처음 봤을 때부터 한눈에 내게 반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중간고사가 끝나고서야 연락을 한 거라고 .(처음 연락 온 내용이 시험 잘 봤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 잘 보이려고 그 어떤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는데 나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좋아해 준 이 사람이 너무 고마웠다. 남자친구는 내가 여태까지 좋아해 온 타입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해 주고, 생각해 주는 모습을 볼수록 나도 그에게 점점 확신이 든다. 그전 연애에서 받은 상처도 아물어가는 것 같은 느낌,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느낌이다. 또 그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 말고도 그 전에는 몰랐던 그의 장점이 정말 많은데, 그 사람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내 스타일 아니라며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그의 많은 매력을 알 기회조차 없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기도 하다. 사람을 대할 때 열린 마음으로 대하라고 하는지도 이번 기회에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여자는 자길 많이 사랑해주는 남자랑 만나야 행복하다는 말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았는데 이젠 알 것 같다. 나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그 사람이 더 사랑스럽고,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지는 것 아닐까?
물론 나와 남자친구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나도 모른다. 나도 아직 어리고 남자친구는 더 어리니까 헤어질 확률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이별의 아픔은 있겠지만 앞으로의 연애에 대한 두려움은 크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 정말 좋아했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면 성숙해진다는 말이 이런 뜻일까?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다 뻔한 말로만 들렸는데 나보다 오래 살았거나 경험한 것이 많은 그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 하나 둘씩 깨닫고 있고,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글. 김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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