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B's Friend] 내 소중한 고양이를 부탁해

  • 이윤상
  • 2015년 4월 2일
  • 3분 분량

잘 쓸 수 있을까. 내가 이 영화에 가진 애정과 느낌이 전달되지 못해 결국은 실패한 글이 되지 않을까. 시작부터 약한 소리를 늘어놓는다며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아끼는 마음이 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책머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해석자는 '더' 좋은 해석이 아니라 '가장' 좋은 해석을 꿈꾼다. 이 꿈에 붙일 수 있는 이름 하나를 장승리의 시 <말>의 한 구절에서 얻었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단언을 즐기는 사람들도 당사자의 면전에서는 잘 그러지 못합니다.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없이는 말할 수 없다는 이런 제약이 저는 가끔 축복 같습니다. (...) 저는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섬세해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섬세한 사람이 되어볼 수는 없을까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실험해보고 싶습니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8p)

나는 청춘 영화를 좋아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청춘이라는 말이 잘 와 닿지 않아 고쳐 쓴다. 나는 갈 곳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갈 곳을 잃었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의심한다는 말과 같다. 아직 자기 자신 외에 책임질 것이 그리 많지 않은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방랑의 힘이 충만하다. 나는 젊은 방랑자들의 영화 중 에서도 특히 한국영화를 좋아한다.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와 <태풍 태양>, 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 조창호 감독의 <피터팬의 공식> 등은 내가 지나온, 그리고 지나고 있는 수많은 풍경들을 담고 있는 영화들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영화는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다.

1.jpg

인천에 있는 여상을 졸업한 태희(배두나), 지영(옥지영), 혜주(이요원), 비류(이은실), 온조(이은주)는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지만 20살을 앞 둔 겨울부터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게 되었다. 각자의 사정만큼 생김새도 다른 미로 속에서 그들은 지영이 주운 고양이를 서로에게 부탁한다. 떠도는 고양이를 따라 영화는 그들을 응시한다.

2.jpg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증권회사로 출퇴근하는 혜주는 누구보다 큰 꿈과 기대를 가지고 서울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콘택트렌즈로 고생하다 라식수술을 받은 후 혜주는 말한다. “다음번엔 코도 약간 높이고 눈도 살짝 찢을까봐. 날 바꿀 수 있는데 까지 바꿔볼 거야” 자기와 다른 사정을 가지고 다른 삶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독한말도 서슴지 않아 친구들로부터 조금은 겉돌지만 이렇게 강하고 냉정해 보이는 그녀도 가끔은 주저앉는다. 평생 잔심부름만 하는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수만은 없지 않겠냐는 회사 상사의 말은 자꾸 그녀를 맴돈다.

3.jpg

고등학교 시절에 혜주와 가장 친했던 지영은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하다. 무전기만한 전화기를 작은 것으로 바꾸고 머리를 노랗게 바꿔 봐도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집은 자꾸만 가라앉는다.

가족들에게 기댈 수 없는 건 태희도 마찬가지다. 다수가 선택하는 정착된 삶을 강요하는 집에서 결국 그녀는 탈출한다. 화목한 가족사진에서 자신을 오려낸다. “난 그냥 계속 돌아다니고 싶어. 어떤 곳이든 한 곳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답답해. 계속 배를 타고 그 어디서도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 다니면서 사는 거야. 이렇게 배 안에 누워서 지나가는 구름도 보고 책도 읽고...”

4.jpg

그녀들이 철저하게 혼자라면 어떨까.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고양이를 부탁할 서로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지영의 무너져가는 집에 태희는 무작정 찾아간다. 갈 곳을 잃고 무너져가는 친구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지영의 집은 무너지고 만다. 그로인해 부모에 이어 조부모까지 잃게 된 지영은 세상에 마음을 닫고 만다. 그런 그녀에게 태희는 손을 내민다. 어디로 갈 거냐는 지영의 물음에 태희는 대답한다. “가면서 생각하지 뭐... 혼자 다니는 것 보다는 너랑 함께 다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5.jpg

주인공들보다 어렸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봤고, 24살이 된 지금도 이 영화를 본다. 현실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흘러간 지영과 태희의 용기 있는 출발도, 새롭게 고양이를 부탁받은 비류와 온조도, 세상과 맞서는 혜주도 모두 힘겹게 몸부림친다. 어렸던 나는 어느새 그녀들보다 훨씬 커버렸으나 여전히 이 영화를 볼 때면 한편으론 내 안에 그녀들을 발견하고 또 한편으론 그녀들을 동경한다. 그 몸짓이 미끄러질 때마다 좌절하겠지만, 그 누구보다 삶을 삶답게 살아내고 있으니까.

글 초반에 청춘이란 말이 잘 와 닿지 않는다고 썼다. 뻔하고 흔한 이유지만 이 방랑의 시간들이 푸른 봄과는 너무나도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를 다시 해석해낸 시인이 있다. 그 시가 떠오른다. 심보선의 <청춘>이라는 시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 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 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번 뿐이라는 청춘이라는”

현실과 꿈 사이의 외줄타기, 삶과 죽음 사이의 외줄타기, 사랑과 치욕 사이의 외줄타기, 그 사이의 힘겨운 삶 속에서 지쳐 갈 곳을 잃을 때면 나는 또 이 영화를 볼 것이다. 그러면 그녀들은 나에게 고양이를 건네줄 것이다. 내 소중한 고양이를 부탁해, 떠나도 좋아, 울어도 좋아,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 길을 잃어도 좋아.

글 - 이윤상

 
 
 

Comments


bottom of page